키나바루(4095.2m) 등정기 : 2009년 2월 18일 - 22일

키나바루-박리_resize.jpg

“가리 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중독성이 강한 등산에 빠져 50 중반의 나이를 잊고 또 다시 해외원정에 나섰다. 물론 젊은 시절부터 등산을 시작한 사람에게 4,000m 급 산은 별 흥밋거리가 아니겠지만, 중년의 불룩한 뱃살 때문에 시작한 사람에게 이 정도의 산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생전에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6,960m)라도 가 봐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작년에 도전한 일본 북알프스의 3,200m급 산에 이어 이번엔 동북아 최고봉인 대만의 옥산(3997m)과 동남아 최고봉인 키나바루를 건너뛰고 막 바로 네팔로 가려했다. 아무리 반 백수에 가까운 직업이라 해도 봉급을 타 먹는 이상 시간적으로 한계는 있다. 2월 중하순에 시간이 나서 같이 갈 파트너랑 여러 트레킹 회사를 알아보았으나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불경기를 또 다시 실감하고 포기하기 직전에 흑기사 최진범(경상대 지구환경과학과) 동기와 혜초트레킹의 키나바루 일정이 나왔다.

“오냐! 키나바루, 너 잘 걸렸다”

5시간의 비행 끝에 코타 키나바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반도에 11주가 있고 보르네오 섬에 사바 주와 사라왁 주 2개가 있어, 모두 13개 주로 되어 있다. 말레이시아 국기에 붉은 색 줄은 모두 14개인데, 이는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이전에 국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코타 키나바루는 사와 주에 있는 50만 관광도시로 키나바루 산이 유명해지면서 원래 도시명은 사라지고 코타 키나바루로 바뀌었다.

지리학자로서는 부끄럽게도 난생 처음 열대우림지역에 온 것이다. 가이드 말로는 우리 국민 70%가 동남아시아를 여행했는데 도대체 당신 무엇 하느라 이제서야 왔냐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2시간가량 버스로 이동해 말레이시아 최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키나바루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저녁식사 후 숙소로 이동했는데, 방갈로 형태의 2층 숙소에는 2인실 방이 3개씩 있었고, 방마다 침대가 있고 온수 샤워도 가능했다. 해발 1,900m 가까운 곳에 이런 시설이 있다니,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의 황당한 시설이 다시금 생각난다.

아침식사 후 스트레칭을 마치고 곧바로 등정길에 올랐다. 자국민이나 외국인 대부분은 짧은 코스인 팀폰 게이트에서 올라 팀폰 게이트로 하산한다. 하지만 한국인만은 메실라우 게이트에서 등산을 시작해 하산은 팀폰 게이트로 한다. 2㎞ 정도 더 길지만 우리 등산객들은 같은 길 되돌아오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출발점으로 메실라우 케이트를 선호한다고 한다. 출발한지 3시간이 조금 지나 해발 2,500m 즈음에 있는 휴게소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키나바루 등산로에는 대략 1㎞ 마다 휴게소가 있는데, 휴게소마다 팔각정과 같은 시설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고 간이화장실과 먹을 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다.

점심을 먹은 이후 머리도 띵하고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고산증세가 조금씩 나타났다. 다시 출발해 3㎞ 가량의 급경사 길을 힘겹게 오르면, 해발 3,300m 부근에 있는 산장에 도착했다. 다행이 날씨가 좋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름 사이사이로 보이는 열대우림의 광활한 풍광이 장쾌하다. 물론 화강암으로 된 정상은 거대한 하나의 암괴로 해발 3,600m에서 정상까지는 식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돌산이다. 다음날 일정이 심히 우려될 뿐이다. 이 부근에는 산장이 서너 개 있는데, 식사는 가장 큰 산장인 라반라타(3.272m)에서만 가능하다. 뷔페 스타일 식당으로 음식은 맛있고, 동양인뿐만 아니라 서양인도 많아 마치 국제회의장의 식당 같은 분위기이다.

키나바루-산장_resize.jpg

내일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잘 수는 없었다. 지난번 일본 북알프스의 야리가다케 산장에서 캔맥주 4통을 먹는 바람에 고산증세로 혼이 나, 이번에는 2개를 사서 1개만 마시고 나머지 하나는 정상에 가서 먹으려 남겨두었다(실제로 정상에서는 마실 수 없었다). 이곳 산장에서도 온수 사워가 가능하다니, 정말 말레이시아의 또 다른 실력을 보는 듯 했다. 사실 동남아시아를 우습게 보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지만,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천연자원과 막대한 농산물 생산으로, 이곳은 풍요 그 자체의 땅이다. 얼핏 이곳 사람의 생활을 보고 게으를 것이라 착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단조롭기 그지없는 이곳 환경에 적응한 이곳 사람들의 생활의 지혜로 봐야 하지 않을까?

7시 조금 지나 침대에 올랐으나 잠이 올 리 없다. 내가 있는 방에는 2개의 2층 침대가 있어 최진범 동기는 아래 칸, 나는 그 위 칸에 자리를 잡았다. 잠결 속에 다른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중에 모두들 한 숨도 자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니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선잠을 1-2시간 이상 밖에 자지 못하고 1시경에 일어나 간식 준비를 했다. 우리는 군용 전투식량을 민수용으로 바꾼 즉석비빔밥을 준비했는데, 그나마 컵라면보다는 먹기가 좋았고 근기도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한 물을 끓일 수 있는 비교적 깨끗한 주방 역시 인상적이었다.

이제 정상 공격이다. 물, 간식, 보온 상의 및 하의를 배낭에 넣고 나섰다. 새벽 2시 40분. 매서운 바람 덕분에 제법 춥다. 이곳에서 3,600m 높이에 있는 사얏사얏 체크포인트까지는 1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출발하니 처음부터 계단 길. 나무계단 하나의 높이가 높은 곳은 무려 70-80㎝ 가량 되는 급경사 길을 벗어나면, 자일을 매달아 놓은 급경사의 화강암 암반길이 나타난다. 숨이 턱에 차 가이드의 지시로 숨을 고르다가 다시 출발했는데, 앞장서 가던 최 군이 길 옆으로 빗겨나며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한다. 이제는 극한상황,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 체 그대로 달려 나갔다. 체크포인트부터는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암반으로, 암반의 중앙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졌고 가장자리 곳곳에 거대한 암봉들이 솟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Low's Peak이 키나바루의 정상이다.

울진에서 건축사를 하신다는 65세의 이기오 선생. 60여개 국을 여행했으며, 킬리만자로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체력으로 갈 수 있는 해외고산등반을 모두 해보았다는 베테랑과 파트너가 되어 한발 한발 전진해 나갔다. 처음에는 50m 가량을 오르고 휴식을 취했으나, 점차 30m, 20m로 그 간격이 줄어들었다. 머리는 아프고 다리는 힘이 빠져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움직이다가 잠시 휴식을 위해 화강암 바닥 위에 누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해지지만, 일어서서 한 발짝만 움직이면 휴식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가 버릴 정도로 탈진 상태였다. 키나바루로 출발하기 전부터 감기몸살이 진행되던 터라, 컨디션만 조금 더 좋았고 잠이라도 조금 더 잤더라면 제법 멋있는 모습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텐데 하면 아쉬워했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했다. 오전 5시.

키나바루-정상_resize.jpg

2.7㎞를 무려 3시간 20분이 걸려 오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하며 기념사진도 찍고 일출을 기다렸으나, 구름에 가린 태양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산 길 정상의 경관은 나를 압도했다. 판상절리에 의한 박리작용 - 쉽게 이야기하면 지하에서 형성된 화강암이 지표에 노출되면서, 형성 당시 지하 수 ㎞ 아래의 압력에서 해방됨으로써 마치 양파껍질 모양의 절리에 따라 암반이 떨어져 나와 암괴지형이 형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규모에 있어 세계적인 지형을 이 우연한 산행에서 만날 수 있다니. 감동, 감동, 또 감동이었다. 제대로 된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아 후회도 해 보았으나, 나의 똑딱이 카메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바로 이 글 서두에 나오는 사진으로 사진 파일 3장을 합성한 것이다.

하산해 산장에서 아침을 먹고 계속해서 산을 내려갔다. 비를 맞으면서 열대우림의 경관을 만끽할 수 있었고, 내려오면 올수록 고산증세가 사라지니 즐거운 하산길이었다. 내려와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근처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코타 키나바루에 있는 리조트호텔에 도착해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다음 날 스노클링,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보트페라슛 등 각종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일정을 위해 쾌속 보트를 타고 섬으로 갔으나 별반 흥미가 없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섬을 빠져 나왔다. 이슬람 사원, 불교 사원, 선셋비치 등 나머지 도심 관광 역시 나의 관심 밖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나는 후진국 여행은 안 해”, “도대체 동남아시아에 말초적 엔조이 말고 뭐가 있어?” 라고 거만을 떨던 나였지만, 최근 읽은 신윤환 교수의 <동남아 문화산책>에서 풍요, 다양, 배려라는 화두는 동남아에 대한 나의 무지에 일격을 가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대한 나의 편견은 이번 여행에서 또 다시 사정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지에 대한 반성도 하기 전에, 기본적인 내공을 쌓기도 전에 또 다른 곳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만 급하다.

이젠 네팔이다. 비록 에베레스트 정상을 못 가더라도, 비록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녀 간 길이라도, 내 방식대로 네팔을 보러 가야지. 7시간 동안 고소공포증으로 손바닥은 식은 땀으로 축축해지겠지만, 네팔을 보러 비행기에 올라야지.

이기호 선생 말이 생각난다.

“반바지를 입을 수 있을 때까지 산을 오르겠다”

  키나바루-진범,나_resize.jpg

<키나바루 등정 도움이>

  ▪ 24시간 이내에 무려 2,300m 가량을 올라야 하는 비교적 산행 강도가 높은 등정이다.

▪ 3,000m를 넘으면 강도는 다르나 거의 예외 없이 고산증세를 보인다.

▪ 1㎞마다 물이 있고 산장에서 식사를 제공하므로 배낭은 30-40리터 정도면 충분하다.

▪ 등반객 6명에 최소 1명 이상의 현지인 산악가이드를 동반해야 하며, 산악가이드는 포터의 역할도 해준다(1박2일 동안 1㎏에 미화 4달러).

▪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으나 정상 부근 암반 구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아웃솔에 부틸 성분이 많은 등산화가 좋다(국내 브랜드로는 K2, 블랙야크, 캠프라인, 트렉스타 등).

▪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오버트라우저, 스패츠, 판초 우의가 필요하고, 고어텍스 상의도 준비하는 것이 좋다.

▪ 날씨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방한을 위한 의류와 장갑도 꼭 지참해야 한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