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면 박물관에 꼭 들르곤 한다. 그래야 그 나라의 역사를 대강이라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델리 국립박물관이 유명하단다. 엄청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관심을 끈 분야는 조각이었다.

 

200년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수많은 유물이 영국으로 반출되어 대영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47년에 반환 요청을 해서 그나마 1,000여점이 돌아왔단다. 박물관은 1960년에 건립되어 나이가 50이 넘었다. 건립 당시의 모습 그대로여서 막 지은 듯한 우리나라 박물관과는 달리 낡은 느낌이 든다.

 

인류 문명 4대 발생지 중에 하나가 인더스 문명이다. 인더스 강 부근의 모헨조다로와 하랍파 문명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먼 기원전 2700년대의 유물들이 있다. 하랍파 부근에서 출토된 여인상이다. 꼭 남미의 고대문명의 조각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술과 주술의 혼합, 아니면 예술은 없고 주술만 의미있을 당시의 종교물들은 모두 비슷한가 보다.

 

 기원전 2000년 경에 제작된 청동상 모습은 힘찬 느낌이 든다. 소가 끄는 전차쯤 되는 것 같다. 남자는 홀딱 벗고 전차를 타고는 자신의 무기를 힘차게 세웠다. 힘의 상징인가? 우리나라 청동기 시기의 부조에도 땅을 파는 남자가 그랬다. 우리의 청동기 문화가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시작했다고 하니, 우리보다 적어도 1000년은 앞서는 셈이다.

 

이건 기원전 2700-2000년 사이에 만든 춤추는 여인상이다. 여자가 역시 홀딱 벗고 춤추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삐쩍 말랐다.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해놨다. 인도 특유의 관능이 조금 나타나고 있다.

 

인더스 문명 이후 인도는 분열되었다. 아리아인들이 기원전 1500년 경 북에서 내려와 인더스 문명을 접수하고 다수의 선주민을 지배하였다. 소수의 지배층은 카스트로 알려진 철저한 신분제로 다수의 선주민을 장악했다. 기원전 6세기 경의 자이나교와 불교는 이런 불평등 조건 속에서 평등과 자비를 주창하면서 등장했다. 불교가 세계 종교로 자리잡은 것은 마우리아왕조(BC321-BC185)의 아소카왕 덕분이었다.

하인을 거느린 왕족부부의 조각에서 인도의 관능미가 매우 진전되고 있음을 본다. 기원전 2세기의 작품이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든 연애하는 남녀의 모습이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화려하게 몸을 치장했다. 몸체 전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앞으로 똑바로 보고 서 있다. 여자의 다리 하나만 굽혀 변화라는 걸 표현해보고 있다. 어깨 동무가 정겹기는 하나, 변화가 적어 관능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숭가제국에서 만든 수행하는 부처라고 이름이 붙어 있으나, 수행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역시 기원전 2세기 때 만든 난쟁이 모습의 남자 정령 약샤, 혹은 야차의 모습이다. 약사는 선주민 드라비다인들의 정령으로 온순하다. 희생제의와 공존했으며, 일찍부터 수많이 제작되었다. 이후에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에서 포섭하여 나름대로 역할을 맡겼다. 난장이고 웃기게 생겼으나 불량스럽진 않다. 친근한 아저씨같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은 불교의 경전을 총정리했다. 하나의 소수 종교로 전락할 뻔했던 불교를 세계 종교로 키운 것은 사실 아소카왕의 공이라고 한다. 국립델리 박물관 뜰에는 그가 발표한 칙령이 누워있다. 영어로 옆에 번역해놨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무슨 내용일까? 조금 궁금하기도 했으나, 포기한다.

 

마우리아 왕조가 기원전 2세기에 망하고 인도는 남북으로 분열된다. 북쪽에는 쿠샨왕조, 남쪽엔 안드리(인드라?)왕조가 열린다. 기원전 4세기 말에 침입한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영향이 이때 북쪽 쿠샨왕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부처의 모습을 조각해서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지역이 간다라였다. 특히 카니슈카왕때 불교가 크게 진흥되었는데, 이때의 불교가 흔히들 중생구제에 촛점을 맞춘 대승불교라고들 분류한다. 아소카 왕때는 소승불교, 카니슈카 왕땐 대승불교....그 분류가 의미가 있는 것인진 잘 모르겠다.

 

간다라 조각은 내용은 불교, 조각기법은 그리스라 할 수 있다. 옷 주름의 처리에서 그리스 조각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조각 분야에서 불모지인 인도에 조각을 전파시킨 것이 아니라 유행하고 있던 인도 조각에 그리스풍이 결합해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인도 조각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처가 죽고 나서 간다라 불상이 나타나기 전의 시대를 무불상시대라고 한다. 그때의 예배의 대상은 부처의 무덤인 탑파였다. 이 시기에는 그럼 조각이 인도에선 유행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게 아니란 거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이 없었다는 말일 뿐이다.

 

간다라 미술은 대승불교가 전파된 중앙아시아, 한국, 일본 불교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슴 앞에서 발 위에서 U자 모습으로 쳐진 옷은 우리 삼국시대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을 거치면서 조금 약화되긴 했지만 말이다. 다른 간다라 양식보다 얼굴부위는 상당히 인도화 되었다. 간다라 미술에서 그리스풍이 약화되고 인도화된 조각이 크게 나타난 곳은 마투라였다. 그래서 그리스의 영향은 받았지만 인도풍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불상을 마투라불상이라고 한다. 이 보살상은 간다라와 마투라의 중간쯤 되는 것같다.

3세기경에 제작한 부처의 일생을 주제로 한 부조이다. 이전의 관능적인 조각이 불교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수도하고 있는 부처를 유혹하는 장면인가 주변에 벌거벗은 여자들이 많이 보인다. 오른쪽이 남녀상은 대단히 매혹적이다. 이후 인도 조각에서 나타나는 관능의 아름다움이 발산되고 있다. 가느다란 허리, 벗은 아랫도리, 풍만한 가슴의 모습이 부처를 주제로 한 부조에서 이렇게 등장하고 있다. 대자대비의 부처의 관념을 가진 우리로서는 쉽게 용납되지 않은 모습들이다.

 

이건 마투라 지역의 조각이다. 2세기에 만들었다. 불교와 관련없다. 고급창녀집이라곤 하나 아마도 당시 인기있는 연예인의 모습 쯤 되지 않을까? 무엇을 나타내려 했을까?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을 남녀 두사람이 데려가려 하고 있다. 풍만한 가슴은 인도 조각에선 이때부터 필수적이었나 보다.

 

320년에 굽타왕조가 열린다. 불교는 다시 힘을 잃어갔고,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지배계급이 힘을 키워 피지배층을 다시 장악했다. 신분이 낮은 것은 전생에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면서 현재의 불평등을 정당화했다. 다양한 잡신들의 세상이 다시 도래했다. 불교도 자인교도 그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산스크리트 문학이 꽃을 피웠다. 관능적인 미술이 더욱 널리 퍼졌다. 불교 조각도 육체가 중시되었다.

 

5세기 굽타시대에 만든 이것은 수르파타카를 괴롭히는 락슈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근데 수르파타카가 누구지? 락슈미는 비슈누의 아내로서 비슈누가 화신할 때마다 그에 맞춰 화신하는 존재이다. 풍만한 가슴과 넓은 엉덩이가 큰 특징이란다. 여기선 중앙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락슈미인듯 하다.

 

5세기 아찬타석굴의 불상들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우리 토함산 석굴암까지 전달되었다. 우리나라 불상중에서 굽타양식의 관능적 성격이 처음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통일신라 직후에 만든 감산사석조여래입상이다. 삼국시대의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고 얇은 잠자리 날개같은 옷을 입었다. 그러니 옷 속의 몸매가 훤히 드러나고 있다. 굽타양식이라고 하지만 이전의 인도 조각에서도 이런 경향은 많이 드러나고 있다. 조각의 주제도 다시 전통의 인도로 돌아갔다. 나중에 힌두교라고 불리는 종교가 이때 다시 회복하였다. 그와 함께 카스트제도도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것은 노래하고 춤추는 집단의 부조로 5세기 작품이다.

 

힌두교에는 가장 중요한 신이 3명 있다.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그들이다. 비슈누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변신(화신이라고 한다.)을 잘한다. 마부가 되기도 하고 난장이가 되기도 한다. 5세기에 만든 비슈누의 모습이다.

 

이건 6-7세기 경에 만든 어머니상들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어머니들의 몸매가 장난이 아니다. 허리를 구부린 모습이 상당히 관능적이다.

 

굽타왕조는 520년에 멸망하고 인도는 다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통일 왕조가 없었다 뿐이지 지방마다 군주들이 존재했다. 박물관에는 이시기의 조각으로 비천상이 많았다. 춤추는 것 같다. 앙코르 와트의 압사라들이 이런 비천상에서 유해한 건 아닐까?

 

날개를 가진 선인들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의 비천상이다. 우리에게도 비천상은 많다. 경주 남산의 탑곡에 조잡하긴 해도 비천상이 새겨져 있고, 성덕대왕신종에도 유려한 비천상이 있다. 인도의 비천상은 우리 것에 비하여 대단히 육감적이다. 남자의 몸매는 과도하게 넓어 이상하지만 여자의 몸매는 쥑여준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기본이다. 굽타양식의 관능성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7세기에 만든 사자 기둥 머리도 재미있다. 사자 두마리가 엉덩이를 맞붙이고 아래를 쳐다보고 있다.

 

이 조각은 어떤 신을 표현한 걸까? 박물관에 소개하는 제목도 '가슴 큰 여인'이다. 곱슬머리에 화려하게 치장하여 아름답다. 눈은 내리깔고 있어 부끄럼 타는 듯하다. 엄청남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음을 부끄러워 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용태에 가슴마저 엄청나니 관능미가 철철 흘러 넘치고 있다.

 

혼란시기인 8세기에 나타난 강의 여신인 야무나신의 조각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 옆을 흐르는 강 이름이 야무나 혹은 자무나 강인데, 이 강 이름이 이 신으로부터 유래했나 보다. 그런데 뭘 보고 야무나신인지 알 수 있을까? 야무나신임을 나타내는 게 뭘까?

 

이것은 8세기에 만든 나브그라스를 보여주는 린텔이다. 린텔은 우리말로 상인방이다. 문틀을 끼워넣는 것 중 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아래쪽의 문지방은 하인방이라고 한다. 나브그라스는 뭐지? 상인방에는 도깨비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큰 얼굴과 앉은 사람모습이 번갈아 새겨져 있다. 앙코르왓에선 상인방 중앙에 아귀같은 신을 새겼다. 배가 고파 자신의 몸을 다 먹어버렸다나.... 그게 우리나라에 와선 도깨비, 도깨비 기와가 되었다.

 

8세기에 만든 '만주스리 팔라'라고 한다. 굽타 미술의 영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아직 무슬림 세력은 들어오지 않은 분열의 시대다. 이때쯤 우리나라 승려 혜초가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다. 천축국 다섯나라를 방문하고 기행문을 써서 중국 돈황굴에 넣어 두었다. 혜초스님이 많이 보았을 조형물들이었을 것이다.

어쨋든 엄청 우아해졌다. 피부도 부드럽고 표정도 엄청 부드럽다. 연꽃같은 걸 들고 있어 꼭 관세음보살같다. 허리가 잘룩해서 여자같지만 인도에서 그 유행하는 왕가슴이 없다. 그렇다면 남자여야 하는데, 얼굴은 영락없는 여자다. 남녀가 혼합되어 있는 우리나라 보살상 같다. 인도에서는 이 정도면 남자라 보아야 할 것이다. 만주스리 팔라가 뭔지는 몰라도.

 

9세기에 만든 조형물이다. 시바와 파르바티의 결혼을 주제로 삼았다. 시바와 파르바티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이었나 보다. 인도 전역의 사원에 이들을 새겼기 때문이다. 파괴의 신인 시바는 고행에 매진하고 있는 파르바티를 아내로 삼아 결혼한다. 파르바티는 성숙하고 아름답게 표현되나 시바와 함께 어둡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상체를 약간 시바쪽으로 돌리고 허리를 심하게 꺽은 모습으로 시바에게 순종적인 파르바티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에겐 두 아들이 있는데, 코끼리 형상의 가네샤와 머리 6개 가진 스칸다가 그들이다. 가네샤와 스칸다가 중간에 보이는 것 같다. 풍만한 가슴과 S라인의 몸매가 교태에 가까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드바라팔라의 상이다. 10세기 남인도 지방의 작품이라고 하나, 남인도와 북인도, 10세기의 특징을 알길이 없다. 남자가 발목장식까지 하고 엉덩이를 돌리고 다리를 살짝 들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드바라팔라는 사원의 남자 수호신이라고 한다. 앙코르 제국의 반테이스레이 사원의 문에는 데바타라는 여자신이 지키는 문이 있고, 드바라팔라라는 남자신이 지키는 문이 있다. 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천왕이 되었나, 팔부신중이 되었나?

 

우마와 마헤슈바라상이라고 되어 있다. 우마는 파르바티를 이름이고 마헤슈바라는 시바를 이름이란다. 시바는 그의 전용자가용인 황소 난디를 타고 있고 그의 오른쪽, 사진의 왼쪽에는 코끼리 얼굴을 띤 아들 가네샤가 있다. 이들은 가끔 자웅동체로 표현되기도 한단다. 시바의 왼손이 우마의 가슴을 떠받치고 있다. 이들의 야한 행위들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했다. 몸매의 분위기는 야릇하나 얼굴의 분위기는 영 아니다.

 

힌두교의 삼 주신 중에 유지의 신인 비슈누신의 모습이다. 11세기에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어깨와 엉덩이가 비슷하고 허리가 가늘지만 관능적인 모습은 아니다. 위에는 비천상이 떠 있고, 주악상, 이쁜 마상,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허리를 꺽은 두 여인상, 그 아래도 화려하다. 앙련, 복련의 대좌위에 서 있는데, 팔이 네개다. 두 팔은 아래로, 두 팔은 위로 올려 무엇을 잡고 있다. 눈은 내리깔고 있다. 비슈누신은 목적에 따라 변신한다. 비슈누가 형상을 바꾼 것을 아바파라고 한다. 비슈누의 아바타는 10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9번째 아바타가 붓다라고 한다.

 

공놀이 하는 여인의 뇌쇄적인 모습이다. 11세기에 만든 것이란다. 아래의 아이들이 공을 올려주고 있고, 엉덩이에도 공을 올려놓고, 한 손은 머리 위에서 뭔가를 잡고 있고, 한손은 아래에 두고 있다. 한 다리는 들고 있다. 엉덩이가 앞을 향하고 있고, 상체도 앞을 향하고 있다. 그렇게 할려면 상체를 심하게 틀어야 한다. 옷은 거의 입지 않았고, 팔, 다리, 목, 엉덩이, 어깨 등에 온갖 장신구를 걸쳤다. 끝내주는 몸매에 풍만한 가슴을 지녔다. 얼굴 모습도 야무지다. 조각하면 그리스, 로마라고 누가 말했던가? 인도의 조각을 보았다면 세계조각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굽타시기부터 나타난 3번 구부린 여자상을 3굴자세라고 한다. 이건 3굴이 360도 입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조각상의 이름은 네미타나로 11세기에 만든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24명의 성인이 나오는데, 이들을 지나라고 하고,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가 24번째 지나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전라로 서 있거나 결가부좌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중에서 22번째 지나가 네미나타라고 한다.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진 모르나 조각으로서는 싱겁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냥 똑바로 발을 모아 서있거나 눈을 부릅뜨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부처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 조각은 락슈미와 함께 있는 나라야나의 조각이다. 11세기에 만들었다. 나라야나는 비슈누의 화신 중에 하나이고 락슈미는 비슈누의 부인이다. 부부사이인 이들이 연애하고 있는 장면같다. 락슈미가 나라야나에게 가깝게 접근하자 그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구부린 자세, 풍만한 가슴 등 인도 조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대리석인 듯하다. 사암보다는 훨씬 매끄럽도 색도 이쁘다. 학습과 지혜의 여신이라고 되어 있다. 11세기 작품이다. 돌출된 부분을 사람들이 많이 만졌나 보다. 많이 보는 인도 조각이다.

 

천상의 무희들을 모히니라고 하는데, 이것이 11세기에 만든 모니히 조각이다. 표정이 별로 맘에 들진 않는다. 오른발목이 뎅강 떨어져 나가 안타깝다. 온몸을 장신구와 문신으로 치장했다. 화려하기 짝이 없다. 엉덩이가 대단하고 젖꼭지도 새겼다. 엉덩이와 상체가 따로 노는 듯하다. 춤추는 표정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13세기에 만든 바루아나니 조각이다. 멧돼지인지 소인지 구분이 안되는 전용자가용이 있다. 여신으로서 풍만하나 관능적인 모습이라 하기 힘들다. 그냥 얌전한 여신인가 보다.

 

13세기에 만든 것으로, 황소를 타고 있으니, 시바신이라고 해야 하겠다. 허리가 상당히 가늘지만 남자의 건장한 모습을 잘 지니고 있다. 황소가 흡족해하고 있다.

 

야한 조각을 보려거든 인도로 가야 한다. 카주라호에 가면 정말 야한 조각이 많다는데.... 돌로만든 조각이 야해봐야 얼마나 야할까?
델리 국립박물관 조각들이 우리의 불교 조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중앙아시아, 중국의 불교 조각이 우리의 불교 조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불교 미술은 인도 조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에게는 불교라는 단일 종교의 조각이었으나 인도는 다양한 종교 조각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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