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일반산행기 -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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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선진학교 방문길에 내소사를 갈 수 있었다. 참으로 여러번 갔던 절간이지만 갈 때마다 가슴 두근거리는 절간이다. 초여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내소사는 우아한 여인같았다.
변산반도 그 남쪽 가운데 한자락의 능선이 중앙으로 뻗었고, 그 가운데 내소사가 자리잡고 있다. 명당임을 알려면 변산에 올라가 내소사로 내려와 봐야 한다. 내소사는 산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뻗은 능선 위에 포근히 자리잡고 있다.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이다. 여기서 전나무 숲길을 한참 걸어가면 대웅전 영역이 나온다. 기둥이 하나라서 일주문이라고 한다. 범아일체, 불아일체 뭐 그런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성한 곳에 들어가는 입구라는 느낌이 들려면 저렇게 기둥이 날렵해야 한다.
700년 된 할아버지 느티나무란다. 내소사 경내에는 1,000년 된 할머니 느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를 저렇게 오색 베로 장식하니 전통의 분위기가 생겨난다. 사진을 보면 스님들이 당산제를 지내고 있었다. 당산제와 불교라. 불교가 애니미즘을 포용하고 있는 셈이다. 포용못할 것도 없지. 예수쟁이들의 저 꽉막힌 편협된 근본주의보단 훨씬 낫다.
전나무 숲길이다. 수령이 110년 쯤 되었단다. 전에는 100쯤 되었다고 했는데, 내가 이 절에 온지 그럼 10년이 되었단 말인가? 전 학교에서도 여길 왔었다. 제주도 가면 다신 못볼 것 같은 절이었는데, 이렇게 오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사천왕문을 지난다. 사천왕문의 어두컴컴한 구조가 그 너머의 세상을 신비의 세상, 진리의 세상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곳을 지나면 부처가 사는 극락세상이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와 계단과 깔끔한 건물들이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살았다. 1,000년 되었단다. 뒷산이 능가산, 아니 변산이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중심축에서 오른쪽에 설선당이 있는데, 그 부근이다. 설선당에도 내소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글씨가 참으로 정갈하다.
중심축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간다. 점점 극락이 되어 가는 것이다. 분위기가 그냥 우아하다. 건물들도 깔끔하고 정갈하다. 조선 후기 18세기 건축물의 느낌이 막 우려나오고 있다. 점점 진리에 다가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은 그냥 자연스럽다. 중첩된 절집으로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17세기 절집과는 대비된다.
설선당을 왼쪽에 두고 올라가면 연래루가 나타난다. 절간에서 이 누각 건물은 대부분 짜투리 목재로 만드는게 보통인 것 같다. 고창 선운사의 보제루는 누더기 집 같은데도 전체와 잘 어울린다. 비록 연래루는 누더기 목재는 아니지만 전체 분위기는 소박하고 단정하다. 18세기 사찰건축을 주도해 나간 상인들의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다.
연래루 누 아래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밑에서 위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난다. 맛깔스런 모습의 대웅전이 능가산 안쪽에 폭 안겼다. 추녀는 살짝 들어 학이 날개를 접는 듯하다. 적당한 높이의 기단 위에 잘 다듬은 목재를 쌓아 올리고 지붕을 올렸다. 아래에서 보면 지붕 아래의 공포가 마치 활짝 핀 연꽃같다. 다포식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외3출목이고 내5출목의 화려한 건물이다. 대웅전 하나 잘 지어놓고 다른 건물은 과감히 생략했다. 18세기 조선의 지방 경제는 점차 지주로부터 상인들로 옮겨가고 있었다. 상인들은 양반이 아니어서 자신의 집을 크고 멋있게 짓지 못했다. 상인에게는 신뢰가 목숨같다. 당시의 화물 운반은 모두 수로를 이용했다. 사나운 뱃길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유교는 내세가 없어 종교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불교가 대신했다. 이런 조건들이 상인들로 하여금 멋있는 절집을 지어 바닷길에서 죽은 동료와 지방민들의 내세를 책임지고자 했다. 신뢰와 덕을 베푸는 최고의 방안이기도 했다. 장사에는 그게 최고였다. 절집이 허술해서는 신뢰가 쌓이지 않는다. 은행이 주변에서 최고로 좋은 건물에 세들어 있는 것과 같다.
상인들은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신뢰를 쌓고 내세를 빌 수 있는 공간에 투자했다. 대웅전 하나 잘 짓고 그것을 장식했다. 대웅전에 이르는 길도 최대한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구축했다. 대신 대웅전 하나는 최고의 멋을 부렸다. 지붕을 최고로 장식할 수 있는 다포식이 활용되었다. 바깥으로 지붕을 많이 뻗어낼 수 있도록 바깥으로 도리를 세개나 더 걸쳤다. 그래서 외3출목이 되었다. 내부를 보면 천정을 높이고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서 안으로 도리를 5개를 걸쳤다. 내5출목을 짰다. 우리나라에서 외3출목 내5출목 건물은 아마도 내소사가 대표일 거다. 얼마나 화려하게 장식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공포들도 조선 중기의 중후한 느낌에서 벗어나 날렵해졌다. 날개처럼 위로 향하고 있다. 귀공포의 모습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같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의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지니면서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렇다고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세련된 화려함, 내소사의 분위기다.
정면 3칸, 각 칸마다 두짝의 문이 달렸으니 모두 6짝의 문이 있다. 문살은 모두 나무로 조각한 꽃살문이다. 어떤 꽃을 모델로 삼았을까?
상인들이 재지사족의 뒤를 이어서 절간 건축을 주도한 것은 18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였고, 그 첫 절간이 논산 쌍계사였다.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 주요 건물만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형식성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러면서도 장식성을 강조했고, 그런 경향이 꽃문살로 나타난 것이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이다. 논산 강경장은 전국 규모의 거대 시장이었다. 지금은 강경까지 들어왔던 바닷물이 매립되면서 강경이 젖갈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다. 강경장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상인들이 지은 절간이 바로 이 쌍계사였다. 역시 효율성을 강조하고 장식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상인이 건축한 초기의 건축이라서 그런지 17세기 분위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꽃살문이 화려하다.
17세기 향촌경제를 장악한 재지사족들은 유교를 이데올로기화하여 불교를 배척하는 척하면서도 향촌 사람들에게 내세를 제공함으로써 향촌지배력을 확보했다. 경복궁 지을 재정은 부족했지만, 그들을 위한 절간은 얼마든지 돈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17세기에 등장한 각 지방의 절간들, 법주사 대웅전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대적광전(1980년대에 소실, 지금 것은 새로 지은 것), 하동 쌍계사 대웅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대웅전 등등이 바로 이런 조건 속에서 나왔다. 그들은 귀족으로서 형식성을 존중하면서 중후한 자신의 존재를 절간의 분위기에서도 나타내려 했다. 전체적으로 안정적이고 대단히 중후한 엄숙함을 지니고 있다. 형석을 존중하니 자연히 권위적 모습을 띠었다. 양반 자신들 처럼. 필요한 모든 절간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다. 유럽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유사하다. 로마네스크 약식은 벽이 두꺼워 내부는 어두웠다. 어두운 가운데 벽에는 묵시록의 무서운 그림들을 그려넣었다. 민중을 공포 분위기 속에서 장악해나갔다. 반면 18세기 상인주도의 건물들은 고딕양식의 서양건물같다. 겹아치와 바깥 벽을 붙잡는 팔로 인해서 벽이 얇아졌고, 내부는 밝아졌다. 상인들의 새로운 세상, 밝은 세상을 스태인드글라스로 나타냈다. 장식하고 환희의 하느님 세상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들과 함께 한 상인들의 건물이 바로 고딕식 건물이었으니, 우리의 18세기 절간 건물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모습은 화려함이 도를 더했다. 내5출목의 소혀모양의 앞으로 나온 장식과 좌우로 층을 이루고 있는 첨차가 직각되게 교차하면서 마치 연꽃모양으로 고주가 받치고 있는 대들보와 중간도리들을 받치고 있다. 대들보 역시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권위보다는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소혀의 끝부분을 펜촉처럼 꾸며 내부로 향하게 했다. 대들보 위에는 어리숙한 듯한 용이 눈알을 부라리고 있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 콧털을 휘날리고 힘없는 뿔을 지니고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온갖 화려한 무늬로 꾸몄다. 장식성이 대단하다. 정면에 보이는 불화 위의 마름모 모양에 단청이 생략되어 있다. 단청을 하는 백일 동안 절대 안을 들여다 보지 말라는 당부에도 불구하고 99일 되는날 동자 한놈이 안을 들여다 보고 말았단다. 단청쟁이는 간데없고 파랑새한마리가 막 날아다니면서 단청을 하고 있다가 문을 열자 파랑새는 떨어져 죽고, 마지막 단청을 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게 바로 저 마름모라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아마도 단청할 때 ,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기를 바라는 당청쟁이가 내 건 조건을 누군가가 어기자 단청쟁이가 다하지 않고 그만 둔 이야기쯤이지 않을까 싶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은 그냥 자연석이다.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경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렝이 기법이다.
설성당은 민가형식을 띠고 있는 절 요사채이다. 부억으로 들어가는 문지방 아닌가 부억방의 휨새가 멋들어진다.
전체로 보니 그 휨새가 더욱 빛을 발한다. 모두 직각되게 기둥의 휘어짐 빼고, 교차하는 직각의 공간배치 속에 아래로 휘어짐이 더해지니 우아하기 짝이 없어진다. 자연석을 사용한 기단과 두개의 계단 그리고 좌우 크기가 다른 앞을 보고있는 방풍막이 잘 어울린다. 좌우의 크기가 다른 것은 뒤쪽의 산세 모양 때문이라 여겨진다. 산세에 따라 집 모양도 바뀌고, 그래야 자연스러워지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참으로 멋들어진 집이다. 내부야 우리같은 범인이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떨지 모르지만. 중들이 없을 때, 집안으로도 한번 들어가 봐야지. 중들이 혼내봐야 얼마나 낼까?
선설당, 연래루, 그 안쪽의 대웅전
대웅보전의 현판, 대웅전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大자는 마치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휘어진 대들보의 모습과 어울린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동국진체의 대가 이광사의 글씨란다. 중국 글자에 메이지 않은 진정한 우리나라의 글씨체를 개발한 이가 이광사이다. 통도사 같은 근엄하기 짝이 없는 절간에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글씨다. 집 모양과 건축 기법과 시대정신이 혼합되어 나타난 현판이다. 이것 역시 우아한 자태의 아름다운 여인같다. 전통미를 지닌 우리나라 여인.
다포양식 외삼출목 건물이 잘 보인다. 우설(소혀)처럼 장식한 살미첨차가 화려하다.
대웅전 내진주 불벽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고 앉아 계신다. 석가모니 부처를 큰 영웅으로 표현했으니 그가 계신 집이 대웅전이 되었다.
불상 뒤쪽에는 관세음보살님이 그려져 있다. 언제,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높은 곳에 앉아 계신 보살님이 이곳을 지나난 사람을 일일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보살님의 눈동자가 걸어가는 사람을 항상 주시하고 있단다. 들어가서 나갈 때까지 눈동자가 사람을 향하여 있단다. 정말 그럴까?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일테다.
옆에 있는 화장실도 멋있다. 대웅전과 설선당 요사채가 품격이 있으니 자연히 화장실도 격에 맞췄다. 들어가는 곳의 높이와 나머지 집 높이가 다르다. 2층으로 들어가 화장(?)을 하면 그 내용물은 1층으로 떨어지는 구조다. 선암사 화장실은 그 차이가 더 심하다.
내소사는 자태가 우아한 조선 여인같은 절간이다. 장식할 수 있는 곳에서는 결코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고 화려하게 꾸몄다. 수수해야 할 곳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충분히 살렸다. 필요한 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효율을 극대화시키려는 상인들의 인생관이 담겨져 있다. 우아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고 싶은 아름다운 절이다. 어떻게나 절구경을 빨리하는지 벌써 내려가고 없는 동료들을 뒤따라 황급히 절문을 나선다. 좋은 것을 놔두고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이젠 진짜 제주도에 살아야 하는 내가 언제 다시 이 내소사에 와 볼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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